믿음과 인식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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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 목사 (목회와신학연구소 소장)

어떻게 우리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가? 어떻게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 이 일을 스스로 해낼 사람은 하나도 없다. 믿음은 결코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과 믿음의 확실성은 혈과 육, 곧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와 감동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칼뱅은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한다(Inst.Ⅲ.i.4). 사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조항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도,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도, 죽었던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은 인간의 이성과 이해력으로는 결코 믿을 수 없다.

물론 믿음은 진리와 관계한다. 믿음은 결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도박과 투기 같은 것이 아니며, 삶의 벼랑 끝에 매달려 어디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채 협곡에 마지막으로 몸을 던지는 모험도 아니다. 믿음은 이해, 통찰, 인식을 지향한다. 어거스틴과 안셀름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당당하게 사실을 말했다.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며, 이성의 적이 아니라는 것은 개혁교회 신학의 익숙한 주제이다.

믿음은 하나님(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 믿음은 구체적인 대상,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하고, 이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그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기를 요청한다(엡 4:13). 앎은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하고, 신뢰는 더욱 깊이 알게 한다. 이렇게 믿음과 인식은 변증법적인 순환과정을 거치며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성경에서 ‘인식’(yada, gignoskein)은 인간을 대하는 한 존재자에 관해 어떤 명제, 원리, 체계 안에서 표현될 수 있는 중립적인 정보의 획득을 뜻하거나 또는 현상적인 세계 저편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자에 대해 수동적인 관조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과정 또는 역사를 뜻한다. 인식이 하나의 역사인 것은, 인간이 그 과정 안에서 자신의 감각, 이성과 상상력만이 아니라 또한 의지, 행위와 ‘마음’을 사용하여 관찰하고 사고하면서, 그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가 우선 외부로부터 낯선 역사로서 그를 만나는 다른 역사(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그 역사와 마주하고서는 중립적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편에서 스스로 개방하고 헌신하며, 그가 그 역사 안에서 만나는 법칙을 따라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운동에 참여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인식’을 뜻하는 ‘기그노스케인’ 또는 ‘그노시스’가 이성적이고 관조적인 지식의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단지 그런 뜻만을 갖는 것이 아님을 보다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동이며, 역사적으로 이해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에게 선사된 구원(눅 1:77), 인간에게 열려진 진리(딤전 2:4),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골 1:6),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요일 4:16), 우리의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그의 의(롬 10:3),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고전 2:12)의 인식과 관계한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빌 3:10),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고후 13:5).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비밀이다(골 2:2).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요 17:3, 23). 그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인식”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지혜와 계시의 영”의 사역이다(엡 1:17).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진리의 성령”(요 16:13)에 의해 인식하는 인간의 고유한 역사에 스며들고 젖어든다. 성령은 이렇게 인간을 계몽하고 그의 양심과 그의 이성을 설득하는, 다시 말해서 밖으로부터 그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그의 능력 가운데서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성령보다 더 건전한 인간의 이해력을 지닌 가까운 친구는 없다(칼 바르트). “믿음”, “사랑” 혹은 “소망”의 개념은 이러한 인식이 있는 곳에 항상 함께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미에서의 인식은 그 자체로 회개(metanoia), ‘정신’의 전환을 뜻하며, 인간이 총체적으로 그에게 인식된 것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이 이 인식 안에서 겪는 변화는 그렇게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이성적이고 논증적이거나 혹은 관조적인 이성의 작동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과정은 “지성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고, 그러한 성과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공허한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분의 비교할 수 없는 힘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때문에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대상이지만 주체가 되는 그분에게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갈 4:9, 고전 8:3, 13:12). 더욱 대담한 표현이 이어진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받고 가짐으로써 우리는 인식된 분과의 교제 가운데서 그분 안에 감춰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골 2:3). 바울은 이렇게 얻은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빌 3:8). 믿음의 공동체가 “지혜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대한 관심이 불일듯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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