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설교신학

0
283

종교개혁은 설교를 발명하지 않았다. 루터 이전에 설교의 대가들이 있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 요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그리고 클래르보의 버나드가 그들이다.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코 수도단은 말할 것도 없다. 종교개혁 이전에 설교는 성서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수사학적 과잉이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충실한 설교가들이 있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는 둘 다 성서에 충실한 설교가였다. 중세 후기 시대에 설교의 비중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설교는 결코 없어지지는 않았다.

종교개혁은 질적이고 양적인 면 양쪽 모두에서 성서적 설교의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다. 개혁자들 대부분이 매주 여러 차례 설교했다. 그들은 성서를 한쪽씩 읽으며 연속적 읽기형식(lectio continua)으로 설교했다. 그들의 설교는 성서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복음적이었다. 개혁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였다.

주요 개혁자들은(멜랑히톤을 제외하고) 설교자들이었지만, 설교에 대한 이해는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뱅은 성례전의 신학에서 의견이 달랐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공재설은 루터에게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이다라고 단언하게 했고, 그래서 그는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루터의 유티키안적 기독론의 경향은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비슷한 평행이 츠빙글리와 칼뱅에게도 있다. 그들은 기독론에 접근하는 것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말씀과 성례전을 다룬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설교에서 얼마간 대립적인 입장을 나타내지만, 칼빈은 자주 중도(via media)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와 츠빙글리를 가르는 이슈는 말씀과 성령 사이의 관계였다. 성령은 말씀과 성례전과는 전혀 무관한 인간 영혼에 주어진 직접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한 열광주의자(쉬배르머)에 대조적으로, 루터는 성령은 말씀에 의해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말씀, 오직 말씀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 수단이다”. 우상 숭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츠빙글리는 루터의 말씀과 성령의 연결을 거부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설교가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열광주의자들과 가까워지고, 성령이 주신 진정한 내적인 말씀을 찾도록 촉구했다. 따라서 츠빙글리는 인간의 설교인 ‘외적인 하나님의 말씀’ (verbum Dei externum)과 성령인 ‘내적인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 internum) 사이를 날카롭게 구별한다.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는 말씀을 인용한다. 설교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지만, 성령만이 이끄신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또한 성서관에서도 의견이 달랐다. 루터는 설교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둘 다에서 들린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 즉 강단이나 성경 페이지로부터 들리는 자유롭고, 영혼을 위로하는 칭의의 메시지이다. 츠빙글리의 생각에는, 성경은 어떠한 인간의 증언보다 더 높이 솟아있다. 하나님이신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며 성경 본문의 유일하고 진정한 해석자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 칼뱅의 위치는 중간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루터와 함께 칼뱅은 일종의 “말씀의 변화”를 확언한다. 설교자들은 인간이지만, 설교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고 성령에 의해 착수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의 입이다. “하나님은 그의 목소리가 사람들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사람들의 입과 혀를 거룩하게 하신다(Inst., IV.i.5). 물론, 설교는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여 듣게 하는 성령과 전혀 별개의 것이다. 츠빙글리와 함께, 칼뱅은 설교의 성서적 기원과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강조하지만, 그는 성령은 설교 안에서 주어지며 마음속에 숨어 기다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설교의 거룩한 과제. 칼뱅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은 놀랍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무익하지 않고 그것이 선언하는 것을 행하신다. 따라서, 설교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면,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은 진실로 용서를 받는다. 칼뱅은 이사야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입에서 나온 그 어떤 것도 그 효과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재빨리 설교의 능력은 성령에 의한 것임을 추가해야 한다. 만약 성령이 말씀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때 설교는, 아무리 능수능란해도, 공허하고 전혀 효력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설교는 고유한 효능을 갖지 않은 인간의 행위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설교와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설교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교를 선택하실 때, 그때 그것은 확실히 구원의 능력이다. 칼뱅은 설교를 하나님의 목적에, 즉 구원에 연결시킨다.

설교가 거절될 때조차 그것은 효과적이다. 설교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거나 완악하게하고, 구원하기도 정죄하기도 할 것이다. 복음의 적절한 일은 구원을 베푸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부패 때문에, 우연적으로 복음은 완악하게 하고 파괴할 수 있다. 칼뱅은 말씀의 양날의 칼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설교자들은 복음이 거부되면 자신들을 변명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설교를 검토해야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칼뱅은 말씀의 수용이나 거부를 하나님의 선택과 연결시킨다.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구원의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오시는 수단이기 때문에 결정적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의 수단은 말씀이다. 그래서 설교는 계시하고 구원하며 명령한다.

1. 칼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을 넘어서는 더 이상의 계시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설교가 현대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져다줄 때, 계시는 그 적용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뱅 자신의 설교는 결코 과거의 성경 연구가 아니었고, 삶에 적용된 교리였다.

2. 칼뱅은 우리가 설교를 통해 받는 은혜의 혜택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우리의 칭의와 우리의 성화 둘 다이다. 죄의 용서는 설교를 통해 주어지고, 거룩함은 설교에 의해 형성된다.

3.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행사하는 수단이다. 주님은 설교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주되심을 드러내신다. 설교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립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방식은 믿음이며, 믿음은 성령의 산물이다. 칼뱅은, 루터와 함께,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를 즐겨 인용하지만, 말씀 없이 믿음은 불가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우리의 귀를 열어 진실로 하나님의 약속을 듣게 하는 성령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칼뱅에게는 수동적이지 않다. 믿음은 행동하는 순종이다.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통치를 세우기 때문에, 회중은 겸손한 순종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개혁자들 가운데서 칼뱅은, 들음은 은사이지만, 설교를 듣는 회중의 능동적이고 지적인 책임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한다. “우리 주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단지 지성만이 아니라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그분을 따를 우리의 마음을 형성해주실 것이다.”

설교와 성경. 칼뱅은 설교가 엄밀히 말해서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라고 주장했다. 설교자들은 성경에서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에 의해 제공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설교하는 말씀의 원천이며 우리의 복음의 메시지를 판단하는 규범이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의 참된 해석자이며 성경의 진리를 내적으로 증언한다. 가끔 칼뱅은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서 성령의 “구술”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엄격한 영감의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오류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이며 따라서 선포의 원천임을 확신한다. 여러 면에서 칼뱅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설교 신학과 유사하다.

설교자. 설교자는 어떤가? 칼뱅에게 설교자들은 말씀의 사절이 되라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다. 설교자는 거룩하고, 통찰력 있고, 학구적이고, 무엇보다도 유능한 교사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직을 위한 자격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성령에 의해 형성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내적인 확신이다. 설교직의 품위는 성격이나 지위에 기초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에 있다. 죄가 없음은 결코 교역을 위한 기준은 아니나, 설교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말씀 아래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령이어 오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교역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Donald K. McKim, ed., Encyclopedia of The Reformed Faith, “Theology of Preaching”(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289-91 정리.

답글을 남겨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