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지향점

0
180

2020. 06. 21. 성령강림 후 셋째주일, 총회제정 6.25 민족화해주일

스가랴 8:18~23

이태영 목사(군산 수산교회)

슥 8: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슥 8: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슥 8:20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슥 8:21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슥 8: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슥 8: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비극’에서 ‘기쁨’으로

예언자 스가랴는 네 개의 금식이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 개의 금식은 모두 이스라엘이 겪은 비극적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넷째 달의 금식은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예루살렘을 파괴한 사건을 반영합니다(왕하 25:3-7). 이때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이 모두 그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후에 놋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다섯째 달의 금식은 바벨론의 장군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파괴하고 불태운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왕하 25:8-9). 일곱째 달의 금식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유다 총독이었던 그달리야가 죽임을 당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며(왕하 25:25), 열째 달의 금식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고 토성을 쌓음으로써 절망과 치욕이 극에 달했던 사건(왕하 25:1-2)을 슬퍼하는 금식입니다.

이 네 개의 금식은 이스라엘의 절망과 슬픔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치욕적인 사건들을 경험하고, 그 무섭고 부끄러운 사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금식을 실시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금식들이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었음을 질책하셨습니다(슥 7:5-6).

스가랴는 이러한 위선적인 금식들이 변하여 희락의 절기, 곧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가 될 것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비극적인 역사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적인 슬픔과 애통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전쟁에서 화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잊자는 것은 아닙니다. “스가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대함’에서 ‘약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고 강한 나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표현에 담겨 있는 의미를 좀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할라”의 어원에는 “약하다”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병들다, 아프다”의 뜻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강대함을 추구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크고 강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말의 힘이 세다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시 147:10)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병들고 아픈 모습을 그대로 보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약하고 비참한 실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집 나간 아들이 돼지우리 두엄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와 울면서 엎드린 것처럼(눅 15:11-32)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에서 ‘하나의 고백’으로

스가랴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잡고 “너희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23절). “말”(라숀)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저마다의 문화가 있고, 삶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말이 달라졌다고 합니다(창 10:5, 20, 31). 이것은 바벨탑에서 “언어”(사파)가 뒤섞여서 흩어진 것(출 11:9)과는 맥락이 다릅니다. 스가랴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심판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서로 흩어져 말이 달라진 인간이 이제 하나의 고백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은 차이가 있지만,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서의 말씀은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향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6.25의 슬픔과 고통을 딛고 서서 소망과 기쁨의 희년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평화적 통일 국가의 모습은 크고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동시에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끊임없이 거듭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서로 말과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한 마음 한 뜻으로 간절히 소망하는 공동체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답글을 남겨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