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와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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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목회와신학연구소 소장)

@ 나가사키, 성빌립성당 앞

‘포스트 코로나’는 어떠한 세상이 될까? 코로나19는 인류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예측불허의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세간에서는 코로나19가 초래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응하려는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대체로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지금껏 통용되던 BC와 AD를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과 ‘질병 이후’(After Disease)로 바꿔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이 나올 만큼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듯하다.

교회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신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인 문제들은 인간적 삶의 경계선에서 발생하고, 신학은 모든 학문적인 가능성의 가장자리 너머에서부터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는 세상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칼뱅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인 삶”(Inst.Ⅰ.xvii.10)을 살아간다. 따라서 칼뱅은 섭리 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뿐만 아니라, 일체의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I.xxii.11).

원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섭리 교리는 이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어떤 체계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으로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 우선 정당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며, 그의 부성적인 선하심에서 유래된 것임을 믿을 수 있다. 마태복음 10장 29-31절은 섭리에 대한 성서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 섭리교리를 믿을 때, 신자들은 “번영할 때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Ⅰ.xvii.7).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실제로 섭리 신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파괴적인 전쟁들, 대지진과 쓰나미, 대홍수와 한발 같은 자연재해들, 암, 에이즈 같은 질병들, 개인과 사회,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죄악들, 그리고 인간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자연 앞에서 매우 흔들리고 있다. 칼 어메리 같은 이는 자연이 사람에 의해 파괴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는 누구든지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지(요 9:3)를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의 어두운 현실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기는 곤란하다. 우리는 다만 성서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일어난 일은 섭리 신앙의 참된 근거와 출발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압도하는 악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며, 결국에는 도와주시고 구원하여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떻게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시편 기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과 그들이 처한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 자주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다. 왜 당신은 당신의 택한 백성과 나를 포기하셨나이까? 왜 당신은 깨어서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으십니까? 왜 악한 일이 선한 사람에게 일어나며 선한 일이 악한 사람에게 일어납니까? 어떤 시편 기자는 또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그러나 처절한 삶의 현실에서 그와 같이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위해 하셨던 일과 그의 백성에게 하신 일을 기억해 낸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또 다른 시인도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을 회상한다. “내가 옛날 곧 흘러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5, 11). 시편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셨고, 도와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거의 언제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고 광야에서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약속한 땅을 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빠트리지 않는다. 시편 기자들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결국에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에 대한 희망은 시편 기자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정의와 평화와 자유에 대한 소망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적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절망적인 울부짖음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절망하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완전하게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조차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과 직접 관계가 있다.

섭리의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연적인 악과 어둠의 세력이 빚어내는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값싼 약속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났을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찬양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들을 건지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그 고통을 감당하시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신앙 경험은 우리의 삶과 삶의 성취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이 위세를 떨치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그리고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에서,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해진다.

성서는 하나님을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슬퍼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은 스올에도 계신다(시 139:8).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음부(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의 고백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증언이다. 이 증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서 희망 없이 제외되거나 배제된 인간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부재의 조건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저주받은 지옥에 이르기까지, 구원과 희망이 상실된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셔서 그것에 갇힌 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간다. 예측불허의 불확실한 미래가 사람들을 불안과 우려로 내몰고 있다. 코로나19가 초래한 미증유의 경제적 충격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그 파장이 얼마나 클지, 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연과 역사를 주관·통치하심을 믿는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려에서” 자유롭게 한다.

섭리 교리는 우리의 책임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칼뱅은 섭리 교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조치와 구제책을 마련해주셨다”(I.xvii.4).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살필 책임을 덜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보살핌이 그 자체로 섭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섭리 교리를 인정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19와 싸우는 모든 노력에 함께 해야 한다. 정부의 방역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생활 속에서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도 섭리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는 일도 섭리 신앙 안에서 지지될 수 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의 섭리를 신뢰하는 자는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 성령이여, 어서 오셔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고통을 당하는 우리로 넉넉히 이길 수 있게(롬 8:37)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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