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에 이끌려

0
239

렘 23:1-4; 벧전 5,1-11; 요 21:15-19

부활절 다섯째주일, 총회제정 어버이주일

정현진 목사(연구위원, 수도교회)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 하셨습니다.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세 번 되풀이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랑의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 앞에 선 우리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가 돌보아야할 양은 누구입니까? 교회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떼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에서 아르니온이란 말은 양떼에서 특별히 어린양을 가리키는 지소어입니다.(꼬마, 꼬맹이 diminutive) 이는 어떤 낱말에서 그 낱말에 들어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작은 개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린 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유아기에 있는 양을 가리킵니다.

‘내 양을 치라’에서 프로바치온(probation)은 장성한 양을 가리키는 프로바톤(probaton)의 지소어입니다. 이는 어린 양(arnion)보다는 크고, 아직 장성하지 못한 양을 가리킵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청소년기·청년기에 해당됩니다.

‘내 양을 치라’에는 이미 성장과정이 끝나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양을 나타내는 프로바톤(probat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시간이든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 돌보며, 어떤 사상이나 태도에 구애받지 말고 다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사랑스럽기는 해도 양육의 책임을 져야하는 부담이 느껴지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아래 위도 제대로 몰라보는 사춘기에 처한 청소년이나 좌충우돌하는 청년기처럼 매사에 반항적이거나 심사가 꼬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어른처럼 자기 주관이 너무나 뚜렷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거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에게 돌보라고 맡긴 사람은, 그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를 구별 없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양이라 생각하며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서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아르니온은 아닙니까? 틈만 나면 반항하는 프로바티온은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프로바톤은 아닙니까? 사정이 이런데도 예수님은 ‘너는 내 양이 아니라’며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우리 어깨에, 우리 심령에 주어진 사람십자가가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순간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자신에게 속삭이시는 사랑의 언어를 기억해내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묵상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의 언어를 기억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십자가, 환경십자가가 제아무리 무겁고 큰 것이라도, 거뜬히 지고 갈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십니다. 이와같은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답글을 남겨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