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의 신학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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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철(목사, 빛과생명교회, 신약학, 목회와신학연구소 연구실장)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조선 민족의 주권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독립선언’을 넘어, 민족 대의와 민족의 미래를 밝힌 ‘인권선언’이요, ‘세계시민선언’이요, ‘평화선언’이요, ‘민주공화선언’이다.(평화좌담회, “지금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의 카이로스인가,” 『말씀과교회』 52호, 81)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담겨 있고,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100년 전 기초된 선언서이지만 근세기 한반도에서 나온 선언들 중 가장 중요한 선언이요, 대한민국 정신사와 사회사의 근원이 되었으며, 더구나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고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 신앙적, 신학적 의의와 근거를 적극적으로 살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에 본 글은 3·1독립선언서를 성서의 시각에서 근원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신학적 의의를 밝히고,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

1. 민족의 탄생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이하 3·1독립선언서는 필요에 따라 원문과 현대어 번역,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를 혼용하여 사용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 1,762글자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민족(民族)’이다. 총 13회 ‘민족’이 언급되고 있다. “민족자존(民族自存)”,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민족적 존영(民族的尊榮)”, “민족적 양심(民族的良心)”, “민족적 독립(民族的獨立)”, “문화민족(文化民族)”, “민족적 요구(民族的要求)”, “민족적 정화(民族的精華)”,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 독립선언의 주체는 민족이다. 독립선언서의 가장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이 ‘민족’이라는 이름의 사용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고 정의하고 있다.

민족은 단순히 혈통 상의 단일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립선언서는 그 선언일을 “조선건국 4,252년 3월”이라 하여 단기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한민족(韓民族)은 반만년 동안 비교적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 왔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이미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 있고, 역사적 부침에 따라 한족, 몽골족, 여진족, 일본족이 일부 섞여 들어왔다. 이는 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지 않은 것과 같다. 비평적 성서 해석은 창세기를 각각의 아브라함 전설, 이삭 전설, 야곱 전설의 합류로 보기도 하고, 이스라엘을 야곱에게서 나온 한 핏줄이 아니라 가나안 땅의 열두 지파 연맹체로 보기도 한다. 출애굽기에서는 출애굽 당시 “수많은 잡족(mixed people or race)”(출 12:38)이 함께 했다고 보도한다. 가나안 정복 전쟁 과정에서는 미디안 족, 헷 족속, 기브온 주민 등 가나안 땅의 가난한 민중들이 해방전쟁에 함께 했고 이들이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을 형성하였다. 성서는 당시 중근동을 떠돌던 유랑계층을 지칭하던 ‘히브리’라는 사회학적 용어가 단일 민족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히브리’로 전환되어 가는 역사이다.

이처럼 민족이라는 구성체는 혈통의 단일성도 중요하지만, 문화나 언어를 공유하고, 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경험하며 형성된다. 선언서는 이 선언이 “5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2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반만년은 한반도 땅에서 온갖 풍상과 영광을 겪으며 형성된 한민족의 유구함과 주인 됨을 드러내는 숫자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주니”라는 선언서의 마지막 문단은 이 땅에서 지난한 역사를 함께 했던 조상들과 연대성을 표하며 그들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에 의해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긴 것은 반만년 역사상 민족이 당한 가장 아픈 시련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민족’이라는 명칭이 없었다. 민족은 영어 ‘nation’의 번역이다. 1900년 처음으로 『황성신문』에 이 단어가 등장했고, 1905년 나라의 외교권을 잃고 난 후 ‘국민’과 차별되는 용어로 ‘민족’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권보드래, “근대 초기 민족 개념의 변화,” 『민족문학사연구』 33권) 이전에는 단지 ‘백성(民)’으로 불렸을 뿐인데 이는 비주체적인 명칭이다. 왕이나 권력자의 통치대상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의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는 선언은 민족의 출범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대선언이다. 한민족은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에 강점당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생명이 깨어났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다.” 선언서는 그 고통을 토로하는데 그 고통은 신체적, 경제적 고통이 아니라 자주성을 잃어버린 민족 생명의 고통이었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 입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실로 삼일절은 민족의 부활이요, 탄생의 날이라 할 것이다. 이는 “음울(陰鬱)한 고소(古巢)” 즉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 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이루어내자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광복절은 이 민족의 자주성이 실체적으로 회복된 날이요, 반면에 분단은 다시 민족 생명의 허리가 잘린 것과 같다. 3·1독립선언서의 민족 자주 선언은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민족사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까지 독립선언은 완성되지 않았다.

민족의 정당성이나 민족 사랑은 신학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신약시대 이후 신앙인들은 민족, 국가, 신분을 초월하여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하늘나라를 향해가는 천국 시민의 정체성은 민족주의를 세속적이라 폄하하기 쉽다. “그리스도교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은 타당한가? 일제 강점기 선교사들은 선교와 정치를 분리하려 무던 애를 썼다. 그러나 민족의 정당성은 이미 성서의 창조기사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은 민족을 단위로 실현되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이 명령은 유지되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창 9:7) 이 명령에 따라 흩어져 번성하던 민족들이 모여 하나의 제국을 세운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이상적 세계는 민족 단위로 흩어져 번성하는 것이었다. 권력이 한 민족에게 집중되는 제국주의는 신의 명령에 도전하는 악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서 흘러간 하나님의 복과 구원사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 단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민족 생명의 자주성과 번성은 하나님이 뜻하셨던 바이기에 출애굽 해방의 역사는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선택 신앙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암 9:7) 출‘애굽’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출‘갑돌’, 출‘기르’의 사건도 있었고, 모든 민족의 해방역사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아테네 한복판에서 “인류의 모든 족속(nations)을 한 혈통으로부터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라 선포한다. 이는 정확히 민족에 대한 정의이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신앙인들이 조국과 민족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하나님은 그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 생명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힘쓰기를 원하신다. 민족사랑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민족은 가족과 같이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사랑의 한계이다. 소극적으로는 복음의 전파와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한데 복음은 대부분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독립선언서의 33인 중 하나인 신석구 목사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신앙체험은 그 신학적 의미가 크다. 신석구 목사는 독립선언서 참여를 요청받고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것도 천도교 세력과 연합하여 이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문제로 고민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한 것을 죄라고 규정하였다. 민족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의 뜻일진데 이를 잃거나, 방치하거나, 고양시키려 적극 노력하지 않는 것은 신학적으로 죄가 될 수 있다.

2. 인권선언민주공화 선언

민족의 주체는 민중(民衆)이다.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한 “조선인(朝鮮人)”은 다름 아닌 “이천만 민중(二千萬民衆)”이다. 선언서는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평등은 제국주의 세력과 여타 민족들 간의 차별 없는 평등을 말한다. 내재적으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양반과 민중의 평등이다. 조선 개국 5백 년, 대한제국 패망 10년 만에 대한인들은 왕실과 양반을 잊었다. 선언서 어느 곳에도 입헌 군주에 대한 언급은 없다. 주체는 조선 민중이다.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自主民)을 선언한다”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를 향하는 외침이지만, 내재적으로는 군주가 아니라 조선 민중이 주인이라는 선언이다.

3·1독립선언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선언이다. 거사가 일어난 지 30일 만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며, 임시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시작하였다. 우리 헌법 또한 이를 계승하여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주권이 전제 군주에게 있지 않고 민중에게 있다는 가장 고전적인 혁명 정신이 3·1운동과 그 독립선언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싸움의 주요 대상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적 요인이었지만, 내재적으로 국가의 주권은 이미 민중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공화정(republic) 또는 공화주의는 혁명과 독립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이 군주정치에 반대하며 내세운 정치체제요 이념이다. 민주주의는 이보다 더 모든 시민의 주권과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정치체제로 링컨의 “인민의(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라는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3·1독립선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 선언이었다.

공화정의 토대는 인권에 대한 개념 규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주요한 세계 인권 선언문들이 있다.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발표된 “미국독립선언”은 천부인권 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과정에서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곧 프랑스 인권선언 또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3·1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의 인권선언이다. 선언서는 민족의 권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기 위한 것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 “우리는 원래부터(고유, 固有)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민족의 권리는 민중의 권리, 시민의 권리로도 바꿀 수 있는데 민족이라는 전체는 개별 인간의 총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에는 평등, 자유, 생명, 행복, 문화 추구권이 담겨야 하는데 독립선언서는 이 항목들을 다 담아내고 있다. 민족이 독립을 추구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려면,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이라 하여 개인의 개발과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1:27, 9:6)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에 그가 주인이든 노예든, 왕이든 백성이든, 백인이든 유색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제국의 시민이든 약소국민이든,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부르주아지든 프롤레타리아든, 정상인이든 장애인이든, 성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존엄하다. 이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은 성서의 정신에 근거하는바, 각 개인은 차별받지 않으며,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가지며, 존엄하기에 어떤 제도나 위력으로도 그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 사회계약론은 이 천부인권 사상에 기초하는데 개인의 자유와 행복 추구를 위해 그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이 정부이고 권력이다. 국민은 계약에 의해 권력을 세울 수도 있고, 계약을 파기한 권력은 해산을 명령하거나 혁명으로 타도할 수 있다.

인간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평등과 차별금지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민족차별 금지로부터 시작하였다. 유대인만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특권을 이방인으로까지 확대한 것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稱義) 복음의 핵심이다. 갈라디아서의 그리스도인 대자유선언은 이를 명백히 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자유의 복음은 민족적 차별을 넘어, 신분과 성적 차별까지 넘어서고 있다. 평등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기초이다. 왕이나 민중이나,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나 모두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가능하게 된다.

구약성서의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사상은 자칫 신정정치나 철인 독재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신정통치가 제기된 근본 이유를 호도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사상은 인간 왕의 실패에서 기인하고 있는바, 왕이 우상이 되고, 인간 권력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인간 왕이 무능력함을 보인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사상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하나님만이 왕이고 그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사상을 부르짖었던 것은 권력자들과 그의 기생하는 자들이 아닌 자유하는 예언자들과 혁명을 꿈꾼 열심당들이었다. 교회사에서 박해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서 군주적 감독제라는 군사적 조직과 사제계급이 등장했던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종교개혁은 이를 바로잡고 만인사제론을 주창했던바 이는 사제의 민주화였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왕이요, 거룩한 제사장인 공화정이다. 현존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정치체제이다. 민주주의가 소수억압, 비효율, 우민화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독재와 불평등과 불의를 견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발현하기에는 이만큼 탁월한 제도도 없다.

3. 비폭력과 평화의 정신

3·1운동은 총칼을 든 일제 앞에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평화적 시위였다. 제국주의의 강력한 무력 앞에 비폭력 저항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평화적 시위였기에 당시 인구의 10%인 200만여 명이 참여할 수 있었다. 세 가지 약속이 담긴 공약삼장에서는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은 정의와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번성하며 살아가려는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멋대로 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에 의해 인명살상, 재산손실, 민족의 자주성과 존엄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임하지 말라는 것은 숭고하면서도 낭만적이기조차 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서의 정신이 여기에 투영되었던 것일까? 미워하지 말라는 정신은 선언서 전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이런 태도는 우리 선열들이 만세시위를 스스로에 대한 참회와 각성의 계기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공약삼장은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고 공언하고 있는데 이는 폭력으로 가지 말고 평화적 시위를 하라는 요구이다. 국정농단을 자행한 박근혜 전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끌었던 촛불시위의 원조는 바로 이 3·1운동이었다. 평화적 시위가 가진 힘은 정당성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대규모 군중동원이 가능하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렇지만 일제는 잔인하게 탄압하여 1,500여 차례에 이르는 전국적 시위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하고, 46,948명이 체포되었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3·1운동이 이후 독립운동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고, 한국 근현대사를 이끄는 정신적 동력과 미래의 청사진이 된 것은 비폭력 평화 시위가 그 도덕적 명분과 정당성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 운동은 평화적 운동이었으며, 초대교회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에 의해 약소민족을 억누름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였다면,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na)는 십자가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함으로 건설되는 평화였다. 초대교회는 오른편 뺨을 치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만드는 폭력적 요구에 대해서 왼편 뺨마저 돌려대며, 십리까지도 동행하는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을 보였다(마 5:39-41). 원수를 대적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축복하는 숭고한 원수사랑으로 나갔다(롬 12:12, 20-21). 군림하고 주관하는 이방 권력자들의 길이 아니라 섬기고 종의 자리로 낮아지는 자기부정의 길로 갔다(막 10:42-44). 이는 ‘이에는 이’ 식의 폭력의 논리로는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폭력이라는 악 자체를 제거하기를 원하셨다. 이는 또한 약자들이 강자들에 대항하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강자들의 폭력에 대해서 약자는 도덕성을 무기로 저항한다. 여기에는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인 ‘아힘사(불살생)’의 정신, 곧 사랑을 이웃을 넘어 원수에게까지 확대하며, 같은 생명체에게 차마 폭력이라는 악을 행할 수 없다는 생명 사랑의 정신 또한 담겨 있다 할 것이다. 3·1운동의 비폭력과 평화는 성서의 평화정신과 생명사랑에 잇닿아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많은 부분 언급되고 있는 것은 ‘동양평화’이다.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2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조선의 독립을 한중일의 동양평화, 나가서는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동양평화라는 말은 이에 앞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언급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동양 삼국의 연합과 평화를 위해서 주창되었다. 일본은 이를 자국 팽창의 계기로 삼는 야만성을 보였고, 안중근이나 독립선언서는 이의 잘못을 질타하고 있다. 선언서는 당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으며, 조선 독립이 동양평화의 기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통일도 남과 북의 합의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해양 세력과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 세력 간의 평화와 공존이 이루어질 때 남북 간의 평화도 통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 평화이며, 세계평화 그 자체이다. 함석헌 선생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주신 이유를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한반도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과 조응할 때 가능하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여순지역에 현대의 유럽연합과 유사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공동체를 꿈꾸었듯이 대한민국은 더 개방적이어야 하며,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민족비전을 가져야 한다. 독립선언서에서 동양평화가 언급되는 순간 조선인은 이미 좁은 한반도 땅을 넘어서고 있다.

평화는 이미 성서에서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나일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사이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우리 한반도처럼 바람잘 날이 없었다. 그들의 인사가 “샬롬(평화)”이 될 정도였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평화의 낙원에 대한 이상을 제시해 주신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정확히 핵과 군사력으로 첨예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오늘의 한반도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평화의 비전을 말씀하신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하나님의 평화의 약속은 매우 국제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중근동에 평화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3-25) 마치 한중일 삼국의 동양평화를 예견하는 듯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이 평화를 성취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던 날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평화는 성서적 가치이며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3·1독립선언서는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민족 이기적인 관점에서 찾지 않고, 동양평화라는 거시적, 이타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보다 도덕적 명분에서 앞서고 있으며, 한민족의 시각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향하게 만든다.

4. 세계 시민으로서의 사명

독립선언서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문화창달을 통한 세계 문명에 기여하려는 의지이다. 민족이 예속당한 고통으로서 든 것 중 하나는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이다. 대한민국을 “우리 문화민족”이라 부르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문명의 빛’이라 표현한다. “수천 년 갈고 닦은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민족 독립을 성취한 후 이루고 싶은 민족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독립선언서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군사 대국화나 경제 대국화가 아닌 문화 대국화이다. 이는 김구 선생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말했던 문화대국과 일치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문화대국화를 꿈꾸는 이유는 한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에는 이처럼 우리 민족이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세계사에 기여하고픈 착하고 아름다운 소망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는 그 한 나라만을 복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전 개역 성경에서는 처음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을 때의 하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하나님은 이스라엘 한 나라를 택해 언약을 세우고 율법을 주어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얼마나 잘 사는가를 보여주는 모델로 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웃 민족들이 하나님 신앙을 흠모하여 앞다투어 야훼를 찾는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셨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설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칠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사 2:2-3)

이 언약사상, 선민사상을 역사 속에 실천한 민족이 아메리카합중국, 곧 미국이다. 청교도로부터 시작된 그들은 스스로를 광야로 심부름 보낸 사명자로, 언약 백성으로, 산 위의 도시(마 5:14)로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였다. 1630년 아메리카로 향하는 아벨라 호 선상에서는 청교도들에게 민족의 비전을 밝히는 설교가 식민지 주지사 존 윈스롭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정당한 이유는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이 사역에 있어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애정으로 서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도시로서 존재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상을 밝히고 있는 이 설교는 지금도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사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를 밝히고 이끄는 모범국가, 지도자 국가로서 인식한다.

3·1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 독립선언서에서 언급된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는 문장은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는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 민족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승전국 지위에 있던 일본이나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외면하였다. 미국은 더 나아가 남북 분단과 이후 한반도 갈등을 심화시킨 장본인이며, 현재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를 가장 더디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산 위의 도시로서 세계의 모범국가가 되는 민족비전이 제국주의라는 민족 이기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김구 선생이 왜 정치, 경제, 군사 대국이 아닌 문화 대국을 꿈꾸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실로 문화대국만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속 국가나 민족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라 볼 때 민족적 비전은 필요하다. 성서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역사상 미국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이미 실험이 되었다. 민족적 사명은 필요하고, 그 사명을 각성한 민족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 독립선언서는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문화대국의 꿈을 선포하고 있다. 산 위의 도시처럼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민족적 사명이다. 독립선언서 곳곳에서 드러나는, 세계 문명을 비출 우리 문화의 꽃으로서는 탁월한 과학기술, 독창적인 예술성, 정의와 인도의 정신, 평화와 연대, 공존과 상생의 문화,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 민주주의의 유산, 사랑과 나눔의 형제애적 공동체성 등을 들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아적 사명” 또한 평화와 통일의 과정에서 세계사에 기여해야 할 우리 민족의 비전이다. 100년 전 선포된 독립선언서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현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미래와 정신과 사명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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