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신학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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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막 14:67)

목회와신학연구소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악한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고 파국적이다. 하나님의 유죄선고를 받고, 영원한 죽음의 저주 아래 사탄의 노예로서 마침내 멸망하는 이것이 죄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유죄선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려졌고,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과 해방이고, 하나님과의 화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죄지은 인간이 마땅한 형벌을 받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관계가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니던가? 물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며, 인간의 죄에 대하여 유죄선고 없이 그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청산과 유죄선고 없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심판했다는 것은 그 심판이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잘못 집행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심판은 사실상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심판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을 내포한다는 말씀에서 입증된다(고후 5:14).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심판자가 우리를 대신하여 유죄선고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롬 4:25). 그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심판이 실행되도록 한 것은 실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시기 위해 아들과 갈라서야 했고, 실로 그에게 등을 돌려야만 하셨다. 그로써 하나님이 선택하신 의롭고 거룩한 그는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은 자가 되었고,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고 죽어야 했다. 이 모든 일은 죄지은 인간에 대한 선하고 자비롭고 좋은 뜻과 함께, 그 뜻에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 사람 예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Vere Deus Vere Homo)이셨지만, 인간으로서 그는 흠 없고 무죄한 것을 제외하면 우리와 전적으로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우리를 위한 고난의 과정에서 희롱과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할 때 얼마나 서운하고 속이 상하셨을까?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릴 때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외로우셨을까? 그러나 그는 기꺼이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마 26:39) 우리를 위한 그 십자가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다.

코로나19는 주일 예배 형태를 바꿔놓았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을까? 아마 부활절에는 공중예배가 가능할 듯하다. 정부의 방침이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방역 체계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코로나19의 상황이 상당히 안정될 때까지는 예배 시에 일정한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손씻기 등 개인위생에 철저함을 기해야 할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 한국교회는 대중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주일 공중예배를 중지하고 가정예배를 선택했다. 그러나 집단거주시설들과 몇몇 교회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에 따른 정부의 집회 금지 행정명령은 그동안 자발적으로 정부의 방역정책에 순응한 신자들을 서운하게 하고, 일부 교회단체의 성명으로 그 분노가 분출되었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정부에 협력했지만, 교회가 마치 바이러스 감염의 온상인 것처럼 취급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교회들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여전히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신천지 위장교인’ 때문이라고 핑계 댈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신천지를 구별하지도 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절로 세상을 향해 파송되며,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을 위한 공동체로 존재한다. 코로나19가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원래 교회가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백성을 미혹하고 소동하는 자로 고발되었고(눅 23:2, 5),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같은 위험에 빠진 자다. 어디선가 여종의 저 날카로운 손가락이 그리스도인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막 14:67).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당신도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냐. 당신도 그의 고난에 참여할 것이며,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방식으로 그와 함께 고난을 겪을 것이다.”

물론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치러야만 했던 최후의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물어야 하는 혹독한 고통에 빠진다는 뜻도 아니다. 비록 지금 어떤 극심한 고난에 빠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가 겪은 곤경과 고난을 겪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그와 같은 곤경과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그 한 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겪으신 고난의 ‘증인’으로서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곤경을 겪는 사람이다. 평화로운 시기에 이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이 자신을 위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실성과 진리에 대해 방어선을 치고 공격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 표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확히 그때가 아니다. 예배하는 그 자체가 위협받고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협당하고 불안해하는 쪽은 그들이다. 누명을 쓰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치밀더라도 자신을 희롱하고 능욕하며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시던 예수님,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견뎌내기를 바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2020.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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